셰릴은 왜 메타를 떠나야만 했나?
마크 저커버그 아닌, 셰릴 샌드버그로 본 페이스북과 메타의 역사
샌드버그와 저커버그 사이에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인터넷의 빌런 된 메타(페이스북)과 샌드버그의 책임은?
샌드버그 없이 저커버그는 메타를 재창업할 수 있을까?
2년 전 여름, 세상은 정말 완벽했습니다. 좋은 사람과 푸른 바다.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었죠. 만약 그날 데이브가 제 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11년에 걸친 우리의 이야기가 땅속으로 돌아가는 데는 채 1주일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위로를 받고 조언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옵션B. 셰릴 샌드버그, 전 메타 COO
셰릴 샌드버그는 남편이 죽은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샌드버그의 남편 데이브 샌드버그는 2015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샌드버그 부부는 멕시코로 주말 여행을 떠났다. 샌드버그는 풀장에 누워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겼다. 남편에게 말했다. “졸려요.” 셰릴은 잠들었다. 오후 3시 41분 무렵이었다. 1시간 쯤 자다 일어난 샌드버그는 집에 남겨두고 온 아이들부터 챙겼다.
데이브 샌드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아들은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아들과 통화한 샌드버그는 비로소 남편이 너무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샌드버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남편이 헬스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걸 떠올렸다. 샌드버그는 헬스장으로 뛰어갔다. 남편 데이브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맡 바닥에는 피가 흘러 있었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다.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샌드버그는 자신이 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남편이 죽었다고 믿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했다. 데이브의 두개골이 골절됐고 피가 흥건했던 게 증거였다. 실제로도 많은 언론들이 페이스북의 COO이자 《린인》으로 여성 리더들의 우상이 된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데이브 샌드버그는 심장부정맥으로 돌연사했다. 셰릴 샌드버그가 남편을 일찍 발견했다고 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셰릴 샌드버그는 미안해했다. 남편의 사망 원인이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셰릴 샌드버그는 미안해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남편의 심장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했다.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졸려요”라는 사실까지도 미안해했다.
셰릴. 디지털 소셜 광고의 어머니
2015년은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가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빠져버린 해였다. 셰린 샌드버그는 업무에 애써 복귀했지만 정상적으로 회의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눈물을 터뜨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였다.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관계는 뒤바뀌었다. 2007년 12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 이후 줄곧 셰릴 샌드버그는 마크 저커버그의 멘토였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는 스물 세 살이었다. 세릴 샌드버그는 서른 여덟 살이었다.
사실 저커버그한텐 샌드버그 이전에도 멘토가 있었다. 냅스터 창업자 숀 파커가 대표적이다. 저커버그의 브로였던 숀 파커는 페이스북의 초대 CEO가 됐다. 정작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숀 파커는 셀럽이었고 마크 저커버그는 너드였다. CEO 파커와 창업자 저커버그 사이에선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고 파국으로 이어졌다.
숀 파커와의 실패는 저커버그가 샌드버그와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반면교사가 됐다. 저커버그와 샌드버그는 처음부터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었다. 저커버그는 CEO로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프로덕트 개발에 집중한다. 반면에 샌드버그는 COO로서 인사와 재무 그리고 대외홍보와 대관업무까지 회사 경영의 전반을 책임진다. 개발과 경영을 분리하는 탁월한 선택은 결국 샌드버그가 소셜 광고 상품을 만들어서 페이스북을 광고 제국으로 재탄생시키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에 따르면, 2021년 글로벌 디지털 광고 시장에서 메타의 시장점유율은 24%에 이른다. 29%인 구글에 이어 2위다. 구글과 메타 빅2가 전세계 디지털 광고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사실 구글의 검색 광고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은 것도 셰릴 샌드버그 구글 검색 광고 담당 부회장이었다. 메타의 소셜 광고를 탄생시키고 키워낸 것도 셰릴 샌드버그 메타 최고운영책임자였다. 그렇게 셰릴 샌드버그는 디지털 광고의 어머니가 됐다.
남편의 죽음, 그리고 저커버그의 성장
그렇지만 메타 안에서 셰릴 샌드버그는 그 무엇보다 마크 저커버그의 오피스 누나였다. 샌드버그는 메타에 몸 담은 지난 14년 동안 언론으로부터 방 안의 어른이라고 불렸다. 애초에 페이스북은 저커버그가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에서 뚝딱뚝딱 만든 서비스였다. 당초 목적도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페이스북이 소셜 미디어로서 레거시 미디어를 대체하기 시작하자 저커버그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늘어났다. 저커버그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미처 모르는 스파이더 키드였기 때문이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 소셜 광고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을 제대로 된 기업 조직으로 재조직한 장본인이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타고난 행정가였다. 1남2녀의 맏딸이었던 셰릴은 어릴 적부터 동생들과 조직적으로 놀았다. 셰릴의 여동생 미셸은 페이스북을 다룬 책 《페이스북 : 더 인사이더 스토리》에서 큰 언니는 자신들과 함께 놀았다기 보단 놀이를 조직하고 운영했다고 회상한다. 페이스북 안에서도 저커버그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둘 사이의 신사협정은 CEO와 COO의 위상을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상보관계로 만들어줬다. 저커버그가 보스였지만 샌드버그가 리더였다.
하지만 2015년 5월의 비극은 저커버그와 샌드버그의 관계까지도 뿌리채 뒤흔들어놓았다. 둘 중에서 리드가 필요한 사람은 이제 저커버그가 아니라 샌드버그였다. 게다가 저커버그는 이미 서른 한 살이었다. 더 이상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만난 셰릴 샌드버그 앞에서 수줍음을 타던 스물 세 살의 하버드 중퇴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커버그는 샌드버그와 달리 전형적인 이과형 천재였다. 공감능력보단 연산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프리실라 챈과 2012년 5월 19일 결혼했다. 2012년 5월 18일 페이스북이 나스닥에 상장되고 하루가 지난 뒤였다. 덕분에 저커버그는 아내로부터 페이스북의 스톡 옵션과 스톡 그랜트를 지킬 수 있게 됐다. 페이스북 상장으로 얻은 주식 재산은 결혼 기간 전에 취득한 것이 됐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커버그는 샌드버그처럼 반려자를 잃은 슬픔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종류의 인간은 아닐 수 있단 뜻이다. 샌드버그가 한없이 흔들리는 사이 저커버그는 쉼없이 샌드버그 없는 페이스북을 지켰다. 이때부터였다. 더 이상 샌드버그는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다. 저커버그도 방 안에 있었다.
2015년 5월의 비극, 셰릴과 페이스북의 운명을 바꾸다
2022년 6월 1일 갑작스럽게 발표된 셰릴 샌드버그의 퇴장은 거슬러 올라가면 2015년 5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이자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책 《대마불사》의 저자로 유명한 앤드류 로스 소킨은 지난 6월 2일자 모닝 칼럼을 통해 이렇게 썼다. “마크는 지난 5년 동안 한때는 페이스북이었고 지금은 메타인 회사를 어떻게 경영할지 초석을 다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셰릴의 실질적인 퇴장은 좀 갑작스러워서 떠밀려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수년에 걸쳐서 느리게 문 쪽으로 조금씩 걸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한 것이다.”
샌드버그가 페이스북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게 된 시점부터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저커버그가 방 안의 새로운 어른으로 누나를 챙기기 시작하면서부터 페이스북의 책장은 조금씩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오히려 샌드버그의 퇴장에서 진짜 예상 못한 부분은 따로 있다. 셰릴이 다음 자리를 보고 발을 뻗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셰릴은 전략적인 인물이다. 셰릴은 이제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지만 분명 방 안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정작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퇴임 이후 “재단과 자선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것도 2015년 5월의 비극과 관련이 있다. 셰릴 샌드버그는 카머라 해리스가 될 수도 있었다. 2015년 무렵만 해도 샌드버그는 2016년 대선 이전엔 워싱턴으로 돌아갈 복안이었다. 만일 그랬었다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옆자리엔 카머라 해리스 부통령 대신 셰릴 샌드버그 부통령이 서 있었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수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전략가들과 워싱턴의 정치 평론가들은 샌드버그가 공직에 출마한다는 걸 상수로 놓고 있었다.
결정적 변수가 생겼다. 2015년 5월 데이브 골드버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이었다. 그때부터 샌드버그는 방 안의 코끼리와 싸워야만 했다. 셰릴 샌드버그는 《옵션B》에서 모두가 누군가의 슬픔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는 침묵 효과를 방 안의 코끼리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샌드버그에게 남편에 관해 묻지 않았다. 샌드버그 역시 누구와도 남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코끼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코끼리에 관해 꺼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원래 샌드버그는 방 안의 코끼리가 아니라 선거판의 코끼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가올 2016년 대선에선 민주당의 당나귀와 공화당의 코끼리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민주당의 상징은 당나귀고 공화당의 상징은 코끼리다). 트럼프라는 등에 태운 코끼리를 상대하려면 클린턴 캠프에 샌드버그 같은 최고운영책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셰릴의 상태는 선거판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상태였다.
2012~2015년, 셰릴의 전성기 : 인스타그램을 대박으로 만들다
셰릴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을 떠나 워싱턴으로 이동할 기회는 이전에도 있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2022년 6월 1일에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2008년 일을 처음 맡을 때에는 이 자리에 5년 정도 있을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사실이다. 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면 말이다. 2012년 페이스북의 IPO가 무탈하게 마무리됐었다면 말이다.
2012년 5월 18일의 페이스북 상장은 다음날 치러진 창업주 저커버그의 결혼식을 제외하면 재난 상황 그 자체였다. 페이스북 주가는 상장 일주일 만에 반토막이 났다. 페이스북 투자자들은 페이스북과 상장 주관사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페이스북이 기업 공개 직전 저조한 모바일 광고 실적을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주장했다.
결국 샌드버그가 수습해야만 하는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저커버그는 신부 챈과 로마에서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기업 공개로 세계 2위의 부자가 됐다.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 적대적인 시장의 여론을 돌려세우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문제였다. 저커버그는 상장 직전인 2012년 4월 10일 10억 달러나 들여서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다. 주주들은 대부분의 M&A에 부정적이다. 회사의 현금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주주들은 특히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 인수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2010년 탄생한 인스타그램은 출시 2년만에 가입자 3000만명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뚜렷한 수익 모델이 없었다. 상장 직전 해인 2011년 페이스북의 영업이익이 딱 10억 달러였다. 저커버그는 1년 치 영업이익을 몽땅 털어서 매출이 0원인 회사를 사들였던 것이다.
물론 저커버그의 선택은 옳았다. 페이스북은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덕분에 소셜 광고 시장에서 독점적 사업자가 될 수 있었다. 전체 디지털 광고 시장에서 구글을 턱 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다. 정작 인스타그램을 페이스북 이상의 막강한 광고 미디어로 만든 건 저커버그가 아니라 샌드버그였다.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인스타그램 광고 부서를 조직하고 인스타그램 광고 전략을 수립했다. 그렇게 성과를 내면서 페이스북에 대한 투자자들의 의구심을 해소시켜 나가는 건 로마의 휴일을 즐기고 있는 저커버그 CEO가 아니라 매일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페이스북 본사가 있는 먼로 파크로 출근하는 샌드버그 COO의 몫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샌드버그는 다시 한번 인스타그램에 올인해야만 했다. 페이스북을 돈 버는 회사로 재창업했던 것처럼 인스타그램도 사실상 재창업을 필요로 했다. 사실 셰릴 샌드버그처럼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시니어 임원은 IPO가 끝나면 회사를 떠나기 마련이다. 상장을 성공시키고 스톡옵션을 챙기는 것이 경제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리콘밸리의 전통에 따랐다면 샌드버그 역시 2012년 전후로 회사를 떠날 일이었다. 상장 직후 샌드버그에게 주어진 스톡옵션과 보너스는 무려 3000만 달러에 달했다.
“미래의 유력한 여성 대통령 후보”
하지만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저커버그로부터 받은 인스타그램 기업화라는 새로운 숙제에 몰두했다. 동시에 페이스북 최초 여성 이사회 임원이라는 당근도 받았다. 당시 페이스북 이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피터 티엘이었다. 저서 《제로투원》으로 유명한 페이팔의 창업자다. 피터 티엘은 페이스북이 아직 페이스북닷컴이던 2004년 마크 저커버그한테 50만 달러를 투자했다. 외부적으론 마크 저커버그의 멘토는 큰 누나 셰릴 샌드버그로 비춰졌지만 실제로 저커버그한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멘토는 피터 틸이었다.
피터 틸의 경영 철학은 단순하다. “경쟁이 아닌 독점을 하라”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밀어내고 급부상하는 인스타그램을 파격적인 금액으로 사버린 건 피터 티엘의 경영 철학을 실천한 결과였다. 결국엔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과 마찰을 빚게 되는 저커버그의 독점적 사고 방식은 2005년부터 페이스북 이사회에서 17년 동안이나 활동했던 피터 틸에게 기인한 바가 크다.
게다가 저커버그는 CEO 뿐만 아니라 이사회 의장까지 겸임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겸임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샌드버그가 노련한 경영자라고 해도 페이스북에서 저커버그를 견제할 자는 사실 없다. 결국 이사회에서 샌드버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샌드버그는 근면성실한 실용주의자답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인스타그램을 두 번째 페이스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론 저커버그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소셜 네트워트 시장의 독점적 지배자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샌드버그는 이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인스타그램은 비쥬얼 소셜 광고에 최적화된 미디어로 재탄생했다. 어떤 면에선 페이스북보다도 파괴력이 더 컸다.
샌드버그는 구글 검색 광고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구글 검색 광고는 소비자의 검색어를 기반으로 광고를 보여준다. 이용자가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구글은 여행 관련한 광고를 보여주는 식이다. 여행에 관심이 있든 없는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광고를 보여주는 TV광고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유저는 구글이 자신의 의도를 읽고 타켓 광고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유저 자신이 검색키워드를 입력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페이스북의 광고는 무의식적이다. 유저가 올린 포스팅의 내용과 좋아요를 이용해서 광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여행을 간 친구들의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른 유저에게 여행 광고를 보여주는 식이다. 무의식적인 행위에 숨겨진 무의식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비쥬얼 중심인 인스타그램의 파괴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텍스트 정보에 비해 이미지 정보나 영상 정보는 유저에게 훨씬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인 영향을 끼친다.
저커버그도 샌드버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유저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들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했다. 샌드버그는 저커버그의 알고리즘으로 광고주가 소비자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커버그와 샌드버그는 자신들이 만든 광고 기법을 소비자 참여형 광고라고 이름 붙였다. 문제는 소비자가 자신들이 광고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을 기업화하는데는 3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을 상업화하는데는 3년만큼은 걸리지 않을 터였다. 2015년 즈음이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광고화는 완성된다는 계산이었다. 이 무렵부터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기업 문화를 남성 엔지니어 중심의 브로 문화에서 젠더 다양성이 균형을 이룬 분위기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건 공직에 있을 때부터 샌드버그가 늘 관심을 기울여온 분야였다. 피터 티엘과 같은 자유주의자와 마크 저커버그 같은 기술지상주의자 사이에서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조직의 균형추와 같은 존재였다.
2012년 《타임》은 셰릴 샌드버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뽑았다. 샌드버그가 구글에 있을 때도 클린턴 행정부 시절 래리 서머스 재무부 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일할 때도 누리지 못한 명성이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샌드버그를 가르켜 “미래의 유력한 여성 대통령 후보”라고 지칭했다. 2013년 샌드버그는 여성 리더십에 관한 베스트셀러 《린인》을 썼다. 샌드버그는 여성들이 기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워싱턴과 실리콘밸리에선 인스타그램을 성공시킨 다음 셰릴이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셰릴 샌드버그가 대통령이라는 기회를 향해 린인할 거란 얘기였다.
2015년 6월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는 그해 인스타그램이 5억9500만 달러의 광고 수익을 벌어들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2년 인수 당시만 해도 수익이 제로였던 인스타그램을 그야말로 제로투대박으로 이끈 것이었다. 샌드버그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셰릴 샌드버그는 자신이 거둔 성공을 만끽할 수 없었다. 2015년 5월 1일 이후 샌드버그의 삶은 달라졌다. 샌드버그는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셰릴은 왜 메타를 떠나야만 했나? 2편 예고
[편집자주] 롱폼(Longform) 기사인 '셰릴은 왜 메타를 떠나야만 했나' 2부에서는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운명이 바뀐 2015년 사건 이후의 페이스북과 셰릴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또 2021년 '메타'로 사명과 회사의 미션을 바꾼 계기와 앞으로 전망에 대한 스토리도 펼쳐집니다.
2편. 그들의 미래 : 셰릴 이후의 메타, 메타 이후의 셰릴 기사 목차
-인터넷의 히어로에서 빌런이 된 페이스북
-최고보안책임자와의 갈등
-시민청렴팀 해체라는 패착
-셰릴의 자리에 카플란
-베일에 쌓인 페이스북의 진짜 2인자
-메타, 나이 40을 바라보는 저커버그의 원맨쇼
-사라진 샌드버그의 유산
-메타는 페이스북이 못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샌드버그의 옵션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