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은 버냉키처럼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더밀크오리지널 : 파워 오브 파월 #2]
제롬 파월은 2008년 금융위기의 후유증이 여전하던 2012년 연준에 합류
당시 벤 버냉키 연준의장의 양적완화가 실수라고 판단했다
파월의 생각을 180도 바꿔버린 결정적인 인물이 있었다
누구였을까?
제롬 파월 스토리 두번째 이야기는, 파월이 달라진 순간
지난 2012년 5월.
신참 연준 위원 제롬 파월은 워싱턴DC 연준 본부 에클스 빌딩에 처음 출근했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4년 전 터진 2008년 금융위기의 뒷수습을 하는 중이었다.
버냉키는 2008년 금융위기를 2번에 걸친 양적완화로 수습해나가고 있었다. 2008년 12월부터 1차로 1조7500억 달러를 풀었다.
1차는 전격적이었다.
2010년 11월엔 2차로 6000억 달러를 풀었다.
2차는 우여곡절의 끝이었다.
규모는 달라도 원리는 같았다.
1차와 2차 모두 시중 은행으로부터 중앙은행이 정부보증채권과 주택저당증권을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쉽게 말해 시중 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채권과 증권을 들고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달러 현금으로 바꿔 줬다.
이런 식의 돈풀기엔 맹점이 있었다.
연준은 납세자들한테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달러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연준이 달러를 나눠준 대상은 메인스트리트가 아니라 월스트리트였다.
정작 월스트리트는 리스크는 피하고 공짜 돈은 즐기느라 가계대출은 조이고 주식 투자만 했다. 경기는 죽는데 주가만 날았다.
이른바 돈맥경화였다.
월스트리트 탓만도 아니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 제공자는 분명 월가의 투자은행과 상업은행들이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이라는 스모킹건까지 있었다. 당연히 규제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연히 규제 강화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금융위기 직후 상업은행의 대출 기준 강화 순비율(Net Percentage of Domestic Banks Tightening Standards) 규제는 무려 80%까지 높아졌다. 한 마디로 개인과 기업의 대출 문턱이 턱 없이 높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연준이 아무리 달러를 풀어도 메인스트리트로는 돈이 흘러갈 리가 없었다. 시중은행을 거쳐 실물시장에 돈을 풀어야만 하는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구조적 한계였다.
이걸 간과한 게 버냉키의 실수였다.
버냉키는 헬리콥터 벤이라고 불리면서까지 달러를 공중 살포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에클스 연준의장이 돈풀기를 주저하는 바람에 디플레이션이 유발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 버냉키는 자타공인 대공황 연구의 대가다.
벤 버냉키는 마리너 에클스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무제한적인 양적완화(QE : Quantitative Easing)로 디플레이션만큼은 막아냈다. 적어도 시중에 통화량이 부족해서 경기가 침체되는 에클스의 실수만큼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리 돈을 풀어도 메인스트리트의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여전히 실업률은 8%가 넘었다.
대공황 이후 최고치였다.
결과적으로 헬리콥터 벤은 이지머니로 금융위기의 원흉인 월스트리트의 배만 불려줬을 뿐이었다. 벤 버냉키 연준의장의 실책은 단순히 월가의 탐욕을 부채질했다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버냉키는 금융위기가 미국을 극단적 소득 양극화 사회로 퇴행하는 걸 막지 못했다.
금융위기로 중산층이 몰락한 미국은 당연히 정치적으로도 양극화됐다.
트럼프라는 혼돈의 군주가 등장하는 배경이 됐다.
버냉키는 금융위기에서 미국경제를 살리려고 돈을 풀었다. 정작 버냉키의 헬리콥터 머니는 정치경제적 양극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버냉키의 실수는 훗날 파월에겐 반면교사가 됐다.
2020년 코로나 경제 위기와 싸우기 시작할 때 파월의 정책 대응이 버냉키와 달랐던 배경이다.
제롬 파월도 절대 벤 버냉키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연준의 역사는 실수의 역사다.
현직 연준의장들은 누구나 역대 연준의장들의 실수를 자신만큼은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설사 부질없더라도 말이다.
파월도 그랬다.
파월이 연준에 합류한 2012년 5월은 버냉키가 급기야 3차 양적 완화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던 시점이었다.
버냉키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했다.
메인스트리트의 실업률을 낮추고 싶어했다.
그것이 자신의 유산이 될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준의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언제나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메인스트리트에 달려있다.
파월은 연준 위원으로서 연준의장 버냉키가 연방준비제도 안에서 3차 양적 완화를 밀어붙이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처음에 파월은 3차 양적 완화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파월이 공화당원이라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파월은 당시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하는 일이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던 티파티 공화당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버냉키도 공화당원이었다. 버냉키도 파월도 공화당원이기 이전에 합리적 공직자였다.
당시 파월이 3차 양적 완화를 반대했던 건 연준이 전통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에서 벗어나서 임플로이먼트 가디언이 되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연준 위원 시절의 제롬 파월은 연준 의장 시절의 제롬 파월과 정반대 입장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당시 월가에선 파월을 연준 내부에서 3차 QE에 반대하는 다른 두 명의 연준 위원과 묶어서 큐이피니티라고 불렀다. 무한하다는 뜻의 인피니티를 비튼 표현이었다.
월스트리트는 버냉키의 이지머니가 무한하기를 바랬다. 지금도 파월의 이지머니가 무한하기를 욕망하는 것처럼 말이다.
월가의 탐욕은 한결같다.
큐이피니티였던 파월의 생각을 영원히 피니티해버린 결정적 인물이 있었다.
버냉키 연준에서 부의장을 맡고 있었던 자넷 옐런이었다.
자넷 옐런 부의장은 FOMC에서 종종 파월과 토론을 벌였다. 옐런은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 연준의 역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파월에게 솔직하게 드러냈다.
옐런의 신념은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었다.
경제학자로서 필생의 철학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학문적 스승인 제임스 토빈과 학문적 동반자인 남편 조지 애컬로프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옐런의 스승 토빈은 대중적으론 토빈세로 유명하다. 학문적으론 연준이 역할이 인플레이션 파이터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인물이다. 옐런의 남편 애컬로프는 정보비대칭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특히 노동시장의 정보비대칭 문제에 집중해왔다.
자넷 옐런은 이른바 모던 중앙은행 학파였다.
전통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다. 경기가 죽든 말든 화폐가치만 지키면 그만이다.
초대 연준의장 에클스가 전형적인 전통 중앙은행장이었다. 그러다 1930년대를 암흑시대로 전락시켰다. 당시 연준은 대공황을 끝낼 수단을 갖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대 중반 경기가 겨우겨우 살아나자 대뜸 금리를 올려버려서 더블딥을 유발시켰다.
뭐든 줬다 뺐든 게 더 나쁘다.
옐런은 일본 중앙은행의 실패 사례도 깊이 연구했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디플레이션의 무한 루프에 빠져버렸다. 경제학적으로 디플레이션은 물가도 내려가고 임금도 내려가는 총체적 경기침체를 말한다.
일본식 디플레이션은 좀 더 심각했다.
일본에선 가계와 기업의 경제 활력이 바닥까지 메말라서 결국 개인은 소비하지 않고 기업은 투자하지 않게 됐다. 옐런은 이렇게 일본의 경제 엔진의 꺼져버린 것도 일본은행이 전통 중앙은행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라고 봤다. 일본은행도 일본 경제를 구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전통 중앙은행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모던 중앙은행 이론 뒤엔 착한 사마리아인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도 외면하는 전통 중앙은행은 나쁜 사마리아인이다.
파월은 연준에서 옐런과 토론하고 교류하면서 모던 중앙은행 학파로부터 학문적 세례를 받게 됐다. 어느새 공화당원 파월은 민주당원 옐런과 같은 편에 서게 됐다.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연준이 금융위기로 망가진 경제를 불완전한 상태로 방치한다면 연준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한 목소리 주장하기 시작했다.
파월은 변호사답게 버냉키와 옐런이 벌이는 실업률 파이팅에 대해 의구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파월은 버냉키와 옐런을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학문적으로 존경하게 됐다. 당시 연준 내부에서 파월은 일종의 대항군 역할을 맡았다. 옐런과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대외적으론 기꺼이 보조를 맞췄다.
파월이 이렇게 기꺼이 옐런의 수제자가 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실 제롬 파월은 정통 경제학자가 아니다.
파월은 은행원이 된 변호사다.
게다가 어공이다.
기업 인수합병 전문 변호사로 잔뼈가 굵은 파월이 2012년 연방준비제도의 위원이 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방준비제도는 자본주의의 바티칸 같은 곳이다.
돈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거시경제신학자들이 미국과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수년에서 수십년에 걸쳐서 돌아보고 내다보는 캐피털리즘 대성당이다. 연준의장은 경제학적 깊이와 정치공학적 실행력을 겸비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대주교다.
정작 파월은 자본주의 신학을 각 잡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연준에 합류했을 때 거시경제학 이론과 통화정책 통계를 따라잡느라 날밤을 세워야만 했다. 신학자가 아닌데 신전의 사제가 된 까닭이었다.
대신 파월은 스폰지처럼 이론과 통계를 빨아들였다.
파월은 고등학교 때부터 포토그래픽 메모리로 유명했다. 고등학생 시절 파월의 별명은 킬러 스마트였다. 파월의 천재적인 기억력은 무한한 숫자와 씨름해야 하는 연준에서 빛을 발했다.
옐런 부의장 아래에서 연준 위원으로 일하던 시절 파월은 모든 회의에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참석했다. 웬만한 연준 업무엔 도가 튼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도 못 보여주는 성실함이었다.
파월의 유일한 약점은 아카데믹 백그라운드였다.
파월의 천재성과 성실함을 인정한 옐런은 기꺼이 파월의 학문적 바람막이가 돼줬다. 물론 파월도 버냉키와 옐런으로 이어지는 모던 중앙은행 학파의 일원이 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파월은 연준의 인싸가 됐다.
윈윈이었다.
연준의 인사이더로서 당시 파월이 목격한 건 버냉키가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는 모습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연준의 인사이더라 연준 내부의 실수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다. 버냉키는 불완전한 양적완화로 실업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3차 양적완화 이후 인플레이션 우려를 인식해서 설익은 양적긴축 카드를 꺼냈다가 오히려 시장의 테이퍼 텐트럼을 유발하고 말았다.
연준의 금리인상과 양적긴축을 의식해 증시가 발작적으로 폭락하는 테이퍼 텐트럼은 자본시장이 아직 2008년 금융 위기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버냉키는 위대한 학자였지 뛰어난 투자자는 아니었다.
시장의 타이밍을 읽는 트레이더 특유의 동물적 감각은 없었다.
연준의장 벤 버냉키는 메인스트리트는 고사하고 겨우 다시 살려놓은 월스트리트마저 망칠 위기에 몰렸다.
이러다 버냉키도 에클스가 될 판이었다. 에클스의 실수를 비판하고 에클스처럼 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에클스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다 아버지를 닮아버린 아들처럼 말이다.
당시 연준 내부에서 버냉키한테 테이퍼 텐트럼을 경고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옐런 부의장이었다. 당시엔 파월도 버냉키의 긴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옐런이 맞았고 버냉키와 파월이 틀렸다.
시장의 발작이 계속되자 버냉키는 양적 긴축을 2013년 12월까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경험은 파월 연준의장한테 두 가지 깊은 교훈을 남겼다.
금리정책의 기조를 완화에서 긴축으로 바꿀 때는 연준 내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 리드 타임이 시장한텐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시장은 설사 준비돼 있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또 다른 깨달음은 자넷 옐런에 대한 깊은 존경이었다. 버냉키의 거듭된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보면서 파월은 옐런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됐다.
버냉키와 달리 옐런은 시장과 소통할 줄 알았다.
경제 위기에 대응해서 양적완화에 진입할 때와 빠져나올 때 버냉키가 저지른 두 번의 실수는 코로나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연준의장으로서 제롬 파월의 정책 타이밍에 반면교사가 됐다.
무엇보다 옐런에 대한 인간적 학문적 직업적 신뢰와 존경 역시 연준의장 파월을 결정이 입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파월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역대 연준의장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더밀크 오리지널 : 파워 오브 파월〉의 다음 세번째 에피소드는 한국시각 8월 27일 토요일밤 10시에 더밀크닷컴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