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직장인 생존법… 이제 승진은 성과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성’이다
[일의 미래] AI로 바뀌는 승진의 문법
AI는 단순 업무를 넘어 중간관리·실행 업무까지 대체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은 연공서열보다 AI·데이터·미래 기술 인재 전면 발탁 중
팔란티어·쇼피파이 등 ‘문제 정의 능력’을 AI 시대 핵심 경쟁력으로 꼽아
앞으로 승진은 과거 성과 보상이 아니라 미래 불확실성을 해결할 사람에 대한 베팅
"이 자리에 사람이 필요한가?"
"AI로 대체할 수 있는 업무를 바로 찾아봐요"
삼성, SK, 현대차그룹 임원실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 질문이 오가고 있다.
더밀크는 실리콘밸리에서 테크 기업들을 현장 취재했다. 엔비디아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부터 지켜봤고, 오픈AI가 세상을 바꾸기 전부터 샘 올트먼을 만났다. 지난 1~2년간은 국내 대기업들의 AI 도입 현장도 직접 들여다봤다. 그렇게 관찰하면서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AI 시대에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승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에 충성한다고 승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성과'조차 승진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하면 올라갔다. 야근하면 인정받았다. 수십 년 쌓인 경험이 무기였다. 성과는 곧 승진을 뜻했다. 그 공식은 지금 이 순간,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AI가 야근을 대신하고, 경험의 가치를 평준화하고, '열심히'를 자동화하며, 성과(매출)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여전히 어제의 규칙으로 오늘의 게임을 하고 있다.
이 글은 그 규칙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규칙 아래서 무엇이 당신을 대체 불가능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실리콘밸리 해고의 물결이 드러낸 것
오라클이 2026년 4월 초, 대규모 감원에 착수했다. 오라클 역사상 최대 규모인 약 3만명을 구조조정한다는 계획이다. 전체 직원 약 16만2000명중 약 18%을 감원하는 초유의 조치다.
아마존은 지난 1월 직원 1만4000명을 해고한 데 이어 최근 본사 직원 1만6000명을 추가로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메타가 직원 수백 명을 감원하기 시작했다.지난해에는 마이크로소프트는 6,000명을 해고했다.
오라클,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 기업의 해고 트렌드에 주목할 점은 이 중 상당수가 '성과 부진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전엔 '해고'와 '성과 부진'은 같은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간관리자까지 해고한다. 관리 계층을 평탄화하고, 기술직을 행정직보다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 중이다.
가트너는 "2026년까지 전체 기업의 20%가 AI를 활용해 중간관리직의 절반 이상을 없앨 것이다"고 전망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핀테크 기업 블록(Block)이다. 블록은 직원의 50%인 4000명을 해고했다.
잭 도시 블록 CEO는 주주서한에서 “대부분의 기업들이 (AI 전환에) 늦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1년 안에 대다수 기업이 같은 결론에 도달해 유사한 구조적 변화를 단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우리 스스로의 방식으로 그 길에 이르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른 회사들도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얘끼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마누엘 호프만 교수 연구팀이 5만 명 이상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2년간 추적한 결과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깃허브 코파일럿을 사용한 개발자들은 코딩에 5% 더 많은 시간을 썼지만, 프로젝트 관리에는 10% 더 적은 시간을 썼다. AI를 쓸수록 조직의 위계가 평탄화되고, 중간관리 업무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데이터들이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AI는 일자리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승진 사다리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행의 평준화, 그리고 새로운 희소성
과거의 승진 문법은 단순했다. 성과가 좋으면 올라갔다. 이 구조의 전제는 '숙련도와 성과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10년을 일한 사람이 1년 차보다 더 많이, 더 잘 안다는 믿음이었다.
AI는 이 전제를 파괴한다. 문서 작성, 분석, 기획 초안, 코드, 리서치 등 모든 영역에서 숙련의 축적 속도는 인간보다 AI가 압도적으로 빠르다.
달리 말하면, AI는 '실행'을 평준화한다. 누가 더 열심히 하느냐의 경쟁은 끝났다. 이제 차이는 전혀 다른 질문에서 발생한다. "무엇을 AI에게 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 즉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이다.
AI 이전의 승진자는 각 회사(조직)이 필요한 과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가져갔다. AI 이후의 승진자는 '문제 정의자(Problem Framer)'다. 일을 정확히 처리하는 사람에서 일을 다시 정의하는 사람으로,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에서 목표 자체를 재설계하는 사람이다. AI는 실행을 평준화한다. 이제 차이는 '무엇을 (AI에 잘) 시킬 것인가'를 정하는 능력에서 발생한다.
팔란티어가 법대 출신을 쓰는 이유
이 논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팔란티어(Palantir)다. 현재 세계 최고의 산업용 AI 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 회사의 데이터 엔지니어 중엔 법대 출신이 유독 많다. 창업자 알렉스 카프 본인도 스탠퍼드 로스쿨 출신이다. 왜 데이터 회사가 코더 대신 법대 출신을 원하는가?
팔란티어가 원하는 것은 코딩 실력이 아니라 '문제 정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팔란티어의 직원들은 고객사에 직접 파견돼 현장에서 함께 먹고 자며 고민한다. 그리고 세 가지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 "이걸 해결하면 임팩트가 얼마나 되는가?", "필요한 데이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 질문이 명확해진 후에야 비로소 기술이 등장한다. 데이터 통합이 될 수도, AI 플랫폼이 될 수도, 프로세스 자동화가 될 수도 있다. 솔루션보다 질문이 먼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태도다. 팔란티어의 시스템은 고객사의 기존 질서를 흔든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C레벨 임원에게 "기존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라고 직언한다. 이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코딩이 아니라 '조직의 사고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팔란티어를 한번 도입하면 쉽게 빠져나가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쇼피파이: "AI가 못 한다는 걸 먼저 증명하라"
팔란티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쇼피파이(Shopify) CEO 토비 뤼트케(Tobi Lütke)는 직원들에게 "추가 인력과 리소스를 요청하기 전에, AI로 해당 업무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증명하라"는 내부 메모를 발표했다. 코딩도, 기획도, 마케팅도 먼저 AI에게 시켜보라는 것이다. 이 메모는 단순한 도구 사용 권고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 전체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라는 선언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코딩이 아니다. "AI에게 무엇을 시킬 것인가"를 먼저 정의하는 능력, 즉 문제 정의 능력이다.
뤼트케는 "AI를 잘 쓰는 것은 반복적 사용을 통해 학습해야 하는 기술"이라며, "이미 자율 AI 에이전트가 팀에 합류해 있다면 이 조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다고 했다. 쇼피파이에서 살아남는 직원은 AI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무엇을 시킬지' 먼저 정의하는 사람이다.
전략 컨설팅의 대명사 맥킨지도 같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올리버 와이만 CEO 닉 스투더(Nick Studer)는 "클라이언트들은 더 이상 파워포인트를 든 양복쟁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AI가 리서치와 분석, 심지어 슬라이드 작성까지 처리하면서, 맥킨지는 프로젝트 팀 인원을 14명에서 2~3명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남은 2~3명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바로 문제 정의다. AI가 내놓은 '평균적으로 꽤 좋은 답변'을 넘어서는, 복잡하고 미묘한 맥락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맥킨지 내부에서도 "AI가 베이스라인 전문성을 대체하는 반면, 복잡하고 뉘앙스 있는 이해는 여전히 인간이 우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세 회사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다. AI 시대의 핵심 인재는 실행의 달인이 아니라 질문의 설계자다.
팔란티어의 법대 출신 엔지니어, 쇼피파이의 'AI 증명 의무화', 맥킨지의 팀 슬림다운 등은 모두 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제 조직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능력은 "올바른 질문을 먼저 던지는 것"이다. AI는 그 다음부터 놀라운 속도로 실행한다.
클라르나의 실패가 가르쳐준 것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는 다른 스토리다. 클라르나는 AI 챗봇이 700명의 고객 서비스 담당자 업무를 대신한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6개월 뒤 고객 만족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CEO는 결국 "우리가 너무 나갔다"고 인정하며 인간 직원 재채용을 시작했다.
이 실패는 단순한 운영 착오가 아니다.
"AI가 할 수 있는 일"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설계하지 못한 판단의 실패다. 그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팔란티어 직원들이 고객사에서 하는 일이고, AI 시대 리더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다. 기술을 쓰는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한계를 정확히 아는 능력이다.
승진은 더이상 보상이 아니다
한국 기업에서도 같은 전환이 시작됐다. 삼성, SK, 현대차 등 주요 그룹들이 AI 전환을 선언하면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어떤 사람을 위로 올릴 것인가'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
그 단서는 인사 발표 문구에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 2026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산업 패러다임의 빠른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AI·로봇·반도체 등 분야에서 미래 기술을 이끌 리더들을 중용했다"고 밝혔다.
주목할 것은 승진자들의 프로필이다. 생형 AI 언어·코드 모델 개발을 이끈 39세 엔지니어, 데이터 기반 신기술·비즈니스 모델 개발을 주도한 전문가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래 일했다'가 아니라 '다음 판을 어떻게 짤 것인가'를 먼저 보여줬다는 점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연공과 서열에 상관없이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해 세대교체를 가속화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미국 관세 등 글로벌 불확실성과 공급망 리스크 해소에 기여한 인력을 승진시키고, 분야별 전문성을 중심으로 세대 교체를 단행했다"고 밝혔다. '불확실성을 해소한 사람'이 올라간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과거의 기여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베팅이다.
오래 일했는가, 성실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C레벨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이 사람에게 다음 5년의 불확실성을 맡길 수 있는가?"
AI 시대의 승진은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베팅'이다. 지난 10년의 헌신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의 방향을 재정의할 수 있는가를 본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AI는 생산성을 높여주지만 모든 사람의 영향력을 높여주지는 않는다. 생산성은 도구의 문제고, 영향력은 판단의 문제다. AI가 실행을 대신할수록, 남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의 몫이다.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한다.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있어야만 가능한 판단은 무엇인가? 내가 사라지면 조직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선명한 답이 없다면, 그 사람은 AI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대체된다. 승진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AI 시대의 승진은 '성과 경쟁'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성 경쟁'이다. 그리고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AI 에이전트에게, 혹은 AI 에이전트를 더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대체된다. 삼성과 현대차가 보내는 신호는 이미 명확하다. 앞으로는 '오래된 사람'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보다 '새로운 판을 볼 수 있고 설계하는 사람'이 승진하게 돼 있다. 한국의 오랜, 그러나 해묵은, '가치'인 '나이순'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