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승부처는 모델이 아니라 '병목' 잡기… 정지훈의 '지정학 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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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권 2026.05.31 15:00 PDT
AI 승부처는 모델이 아니라 '병목' 잡기… 정지훈의 '지정학 알파'
정지훈 아시아투지(Asia2G·A2G) 캐피탈 제너럴 파트너가 지난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플러그앤플레이(Plug & Play). 제3회 비욘드아시아 테크 서밋(BeyondAsia Tech Summit)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 더밀크 손재권)

[비욘드아시아 테크 서밋 2026] 정지훈 파트너
AI는 모델 레이스가 아니라 인프라 레이스
병목은 2023년 GPU에서 2025년 메모리(HBM)로 이미 이동.
다음 병목은 2027년경 전력, 그 뒤엔 로봇·공장 현장의 AI될 것.
한국은 'AI 인프라' 설계하고 병목 쥐는 국가 될수도 있지만 '중간재'에 머물수도.

지난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플러그앤플레이(Plug & Play). 제3회 비욘드아시아 테크 서밋(BeyondAsia Tech Summit) 무대에 오른 정지훈 아시아투지(Asia2G·A2G) 캐피탈 제너럴 파트너는 손으로 그린 낡은 낙서 한 장을 화면에 띄웠다. 2001년 제프 베이조스가 식당 냅킨에 그렸다는 그림. 동그란 바퀴 하나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베이조스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가격을 낮추면 손님이 모이고, 손님이 모이면 판매자가 늘고, 판매자가 늘면 다시 가격이 내려간다. 한 번 돌기 시작하면 알아서 점점 빨라지는 바퀴, 그게 아마존을 키운 '플라이휠(flywheel)'이다. 플라이휠은 20년 넘게 인터넷에서 돈을 버는 법의 정석이 됐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지난 2001년 냅킨에 그린 '플라이휠' (출처 : 정지훈 아시아투지캐피털 파트너)
AI 산업도 똑같이 돌아가는 바퀴다. 한 단계의 결과물이 다음 단계의 연료가 된다. 그 바퀴에서 가장 막히는 지점, 즉 '병목(bottleneck)'이 어디로 옮겨가느냐에 따라 다음 10년의 돈이 어디서 벌릴지가 정해진다
정지훈 아시아투지캐피털 파트너, 비욘드아시아테크서밋 기조연설

정 파트너는 이 25년 전 그림을 지금의 AI에 접목했다.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메타, 단 네 회사가 지난해(2025년) AI 인프라에 쏟아부은 돈이 2000억 달러(약 302조원)를 넘는다. 마이크로소프트 한 곳만 약 800억 달러를 AI 데이터센터에 썼다.

정 파트너는 이 돈의 정체를 짚었다. "소프트웨어 개발비가 아니다. GPU는 물론이고 메모리, 칩을 쌓는 패키징 기술, 전기, 냉각 장치, 데이터센터, 송전선으로 흘러간다."

다시 말해 AI 경쟁은 누가 더 똑똑한 모델을 만드느냐의 싸움에서, 그 모델을 돌릴 거대한 시설을 누가 깔 수 있느냐의 싸움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정 파트너는 이 'AI 바퀴'가 여덟 개의 톱니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칩(실리콘) → 전기(에너지) → 데이터센터 → 로봇·공장 같은 현장 컴퓨팅 → 인공지능 → 화면 속 AI 서비스 → 현실 세계의 AI(로봇·드론) → 그리고 여기서 번 돈이 다시 칩과 전기에 투자된다. 한 바퀴가 다음 바퀴를 밀어주는 구조다.

AI 플라이휠 (출처 : 정지훈 아시아투지캐피털 파트너)

그가 강조한 건 이 바퀴가 지금 두 개 돌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이미 빠르게 회전 중인 바퀴다. 챗GPT 같은 서비스를 떠받치는 GPU, HBM(고성능 AI 메모리), 데이터센터가 서로를 키우는 흐름으로, 앞서 말한 2000억 달러가 바로 여기로 들어간다. 두 번째는 이제 막 돌기 시작한 바퀴다. 공장, 로봇, 드론, 자율주행차처럼 AI가 화면 밖 현실로 나오는 영역이다. 정 파트너는 이를 각각 '하이퍼스케일 루프'와 '스페이셜 루프'라 불렀다.

두 바퀴는 같은 축(軸)을 공유한다. 칩, 전기, 인공지능, 돈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해지면 두 바퀴가 동시에 느려지고, 하나가 넉넉해지면 둘 다 빨라진다.

정지훈 아시아투지(Asia2G·A2G) 캐피탈 제너럴 파트너가 지난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플러그앤플레이(Plug & Play). 제3회 비욘드아시아 테크 서밋(BeyondAsia Tech Summit)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 아시아투지캐피털)

병목 발견에서 큰 기회가 나온다

정 파트너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병목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병목은 말 그대로 병의 좁은 목, 즉 전체 흐름에서 가장 막히는 부분을 뜻한다. 정 파트너는 "막히는 지점이 시간이 지나며 자리를 옮기고, 돈도 그 자리를 따라 움직인다"고 말했다.

실제 2023년만 해도 가장 부족했던 건 GPU 자체였다. 엔비디아 H100을 사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2025년이 되자 병목이 메모리(HBM)와 패키징 기술로 옮겨갔다. 그리고 돈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증거는 한국 기업의 실적이다.

SK하이닉스는 2025년 영업이익 47조 2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고, HBM 매출은 1년 만에 두 배 넘게 뛰었다. 정 파트너는 SK하이닉스가 2025년 2분기 세계 HBM 시장의 62%, 삼성전자까지 합치면 한국이 약 80%를 쥐고 있다고 했다. 병목이 메모리로 옮겨가자, 돈도 한국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병목은 어디인가? 정 파트너는 2027년경 전력과 송전망이 가장 강력한 제약 조건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칩 경쟁이 끝나서가 아니다. 칩은 전기와 냉각, 송전 없이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드론·로봇·공장 가까이에서 AI를 실행하는 엣지 추론(edge inference)이 핵심 병목으로 떠오르며, 비로소 스페이셜 루프가 점화된다.

그는 "AI 산업은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회전하며 움직인다"며 "다음 병목을 푸는 기업이 다음 10년의 승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다음 병목 예측 (출처 : 정지훈 아시아투지캐피털 파트너)

정 파트너는 이 바퀴가 진공 속에서 도는 게 아니라 국제 정치 한복판에서 돈다고 봤다. 그러면서 2026년 이후 세계의 운명을 가를 두 가지 변수를 꼽았다.

전기가 충분한가 부족한가? 그리고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가 아니면 미국·중국 식으로 편이 갈리는가? 여부다.

전기도 넉넉하고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으면 거대한 바퀴 하나가 시원하게 도는 '황금기'다. 전기는 넉넉한데 세계가 미국·중국·기타로 쪼개지면 작은 바퀴 세 개가 따로따로 도는 모양이 된다. 가장 위험한 건 전기도 부족하고 편까지 갈린 상황이다.

정 파트너는 "지금 세계가 점점 편이 갈리는 쪽으로, 그리고 전기가 점점 더 발목을 잡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위험한 구석으로 한 걸음씩 가고 있다는 경고다. 이어 "바로 이 어정쩡한 위치가 한국에게는 기회가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가진 네 장의 카드, 그리고 '제3의 선택지'

정 파트너는 한국이 AI 시대에 4개의 카드를 가진 보기 드문 나라라고 평가했다. 가장 중요한 카드는 오늘날 AI 산업의 가장 큰 병목인 '메모리'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세계 HBM의 80% 이상, 전체 메모리의 70%를 쥐고 있다. 그는 이를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값나가는 카드"라고 표현했다.

한국은 대만 TSMC를 완전히 대신하진 못해도 1~1년 반 안에 일부를 메워줄 수 있는 패키징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조선·자동차·디스플레이·반도체라는 네 개의 현장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빽빽한 'AI 실험장'이다.

중국 시장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미국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묘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국가 생존의 위기의식을 높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어느 한쪽에 묶이지 않은 균형자 역할을 할수도 있다.

정 파트너가 이 '제3의 선택지'를 증명하는 사례로 든 곳이 한국의 AI 추론칩 기업 리벨리온(Rebellions)이다. 이 회사는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계열 투자사의 돈을 받고 현지에서 실증 사업을 진행 중이다. 정 파트너는 이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읽었다.

그는 "자기 나라만의 AI를 갖고 싶어 하는 나라들(이른바 소버린 AI)이 이제 엔비디아 한 곳에만 매달리지 않고, 두 번째·세 번째 공급처를 찾기 시작했다는 신호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편의 엔비디아, 중국 편의 화웨이 사이에서 어느 강대국도 함부로 끊을 수 없는 컴퓨팅을 원하는 흐름이 한국에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결론은 선택의 문제로 모였다. 정 파트너는 앞으로 10년, 한국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했다. 메모리와 패키징, 현장 데이터를 협상 카드로 써서 세계 AI 인프라를 함께 설계하는 길, 그리고 그냥 부품만 실어 나르며 중요한 결정은 남에게 넘기는 길이다.

그는 전자를 '액티브 아키텍트(능동적 설계자)', 후자를 '패시브 서플라이어(수동적 납품업자)'라 불렀다. 지정학적 알파는 점쟁이의 예측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는 것이다.

바퀴는 이미 돌고 있고, 막히는 지점은 움직이고 있다. 지정학적 알파(Geopolitical Alpha)는 예측이 아니라 선택이다.
정지훈 아시아투지캐피털 파트너, 비욘드아시아테크서밋 기조연설
정지훈 제너럴 파트너의 AI 플라이휠

한편, 비욘드아시아 테크 서밋(beyondAsia Tech Summit)은 한국과 아시아의 초기 단계 기술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하는 아시아투지(Asia2G) 캐피탈이 매년 실리콘밸리에서 여는 행사로, 올해가 세 번째다. 올해는 실리콘밸리 창업자와 벤처캐피탈, 테크 기업 경영진 225명 이상이 모였다.

정지훈 파트너의 오프닝 키노트에 이어 무신사, 스킬벤치(SkillBench), 엔씨, 서치독(SearchDoc), 한화, 하이퍼액셀(HyperAccel), 노매딕 드론(Nomadic Drone) 등이 발표했다. 아시아투지캐피탈은 미국·일본·한국에 걸친 창업가와 전문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크로스보더 진출과 시장 전략, 자금 조달, 사업 개발 등을 돕는다. 더밀크는 이 행사의 미디어 파트너로 참여했다.

더밀크의 시각 : 한국은 AI의 골든타임을 지나고 있다

정지훈 파트너의 'AI 플라이휠'론은 산만하게 흩어진 AI 인프라 담론을 하나의 동역학으로 묶은 '탁견'이다.

특히 '병목은 이동하고 가치는 그 병목을 따라간다'는 명제는, GPU에서 HBM으로 이미 한 차례 검증된 만큼 설득력이 크다. 한국 입장에서 이 프레임이 매력적인 이유도 분명하다. 수동적 부품 공급국이라는 익숙한 자기 인식을, 인프라를 함께 설계하는 주체로 다시 쓸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다만 더밀크는 정 파트너의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세 가지 단서를 붙이고 싶다.

첫째는, 다음 병목이라는 '전력'은 한국에도 기회가 아닌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국이다. 국내 AI 데이터센터 증설 자체가 전력망과 입지 제약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남의 병목을 풀어주는 한국'이 될 수 있지만 지금은 '제 병목에 막힌 한국'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 '제3의 컴퓨팅 옵션'이라는 수요 신호는 실재한다. 하지만 리벨리온 같은 기업의 검증(validation)과 규모화(scaling)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PoC 한 건과 엔비디아에 맞설 제2의 공급망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메모리 듀오폴리'라는 강력한 카드를 가지고도 지난 수십 년간 '수동적 중간재 국가(패시브 서플라이어)'로 위치하며 중요한 카드를 곧장 현금화해 왔다는 점이다. 그룹 계열사 키우기와 거버넌스 확보를 위해 쓰여진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부품 우위를 인프라 설계 권력으로 전환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정 파트너의 주장대로 병목은 움직인다. 현재 가장 큰 병목인 메모리 공급 부족이 해소되는 시점에는 파워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자본과 시스템 통합, 그리고 한국이 전통적으로 약했던 정책 조율 등이 계속 부진하자면 모처럼 온 '황금기'를 날려보낼 수밖에 없다.

핵심 질문은 유효하다. 한국은 AI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토큰 소비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AI 인프라를 설계하는 나라(토큰 설계자)로 올라설 것인가? 정 파트너의 표현을 빌리면, 바퀴가 한 바퀴 더 돌기 전에 포지셔닝할 것인가, 돌고 난 뒤에 포지셔닝당할 것인가. 지금이 그 선택의 '골든타임'이다.

토큰 팩토리 혁명 (출처 : 더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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