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2026: 우리가 알던 규칙은 무너졌다… AI 시대 생존 공식 5가지
[지상 강연] 손재권 대표 더밀크데이/DLG세미나 강연
코드의 75%를 AI가 쓰는 시대, 인간은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역할로 이동
투자 시장은 ‘풍요 속 가뭄’… 자본은 줄지 않았지만 오픈AI·앤트로픽 등 극소수에 집중
SaaS 해자는 붕괴 중… AI 에이전트가 UI·데이터 락인을 무력화하면서, 자본·인프라·도메인 깊이만이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더밀크는 지난 4월 28일 협력기관인 법무법인 디엘지(DLG)와 함께 서울 서초구 드림플러스에서 '테크 앤 바이브 : AI 하이프를 넘어, 창업자는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 란 주제의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했다. 이어 30일에는 더밀크 회원들(밀키스)과 함께 '더밀크데이'를 개최했다.
손재권 더밀크 대표는 이 자리에서 '실리콘밸리 2026: 우리가 알던 그곳, 그것은 없다'는 주제의 기조연설을 통해 현장에서 직접 발굴한 인사이트를 전했다. 현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는데 더밀크에서 지상 중계를 통해 강의 내용을 살펴본다.
실리콘밸리 베이 에어리어의 엔지니어들은 요즘 "세상이 2주 단위로 바뀐다"고 말한다. 한 해 단위, 한 분기 단위로 트렌드를 정리해 한국에 전달하던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작년에 가장 잘나가던 회사가 올해 1분기에 매각됐다. 이런 속도로 진행되는 변화 앞에서 "실리콘밸리는 이렇다"라는 단언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
올해 1분기에 개최된 글로벌 이벤트인 CES, MWC, GTC를 현장에서 커버하며 인사이트를 발굴해낸 미디어는 더밀크 뿐이다. 휴머노이드를 직접 구분할 수 있게 됐고, 손가락 다섯 개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산업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 그 안에서 얻은 통찰, 그리고 한국 비즈니스 독자들이 지금 당장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를 다섯 개의 축으로 정리한다.
[강연 목차]
1. 일이 개념이 바뀌었다: "개발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시대
1-1. 토큰 맥싱(Token Maxxing): 사용량이 곧 KPI
1-2. AI는 앱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기인 이유
2. 투자 환경이 바뀌었다: 풍요 속의 가뭄, 초거대 투자유치의 그늘
2-1. 오픈AI 단일 거래가 전체 시장의 43%
2-2. 투자금 회수 가뭄, 그리고 구주 거래의 부상
2-3. 유니콘은 미국 독점, 모멘텀은 물리적 계층으로
3. 스타트업 생존공식이 바뀌었다: 스티브 블랭크의 경고
3-1. 붕괴된 세 개의 법칙
3-2. "자본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시대"
3-3. SaaS 아포칼립스: 진짜 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4. 실리콘밸리는 이런 스타트업을 찾는다.
5. 한국 스타트업과 VC, 이렇게 해야 한다
5-1. 시작부터 글로벌
5-2. 결국 남는 것은 '본질에 기반한 진화력'
1. 일이 개념이 바뀌었다: "개발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시대
커서(Cursor)가 스페이스X에 인수됐다. 약 90조 원이라는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가늠도 안 되는 숫자다. 한국에서 "바이브 코딩"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고 알리던 ARR(연환산매출) 곡선을 오픈AI보다 빠르게 끌어올렸던 그 회사가 일론 머스크 손에 넘어간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마이클 트루엘 CEO가 회사 성장의 한계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무한한 GPU 파워와 에너지 공급을 약속한 일론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커서를 쓰던 개발자들이 지난해 연말부터 급격히 클로드 코드(Claude Code)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코딩 툴을 산업혁명 도구로 바꿔놓은 앤트로픽(Anthropic) 앞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커서는 그렇게 인수의 형태로 정리됐다.
실리콘밸리에서 친구를 만나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요즘 뭐 만들고 있어?"라고 묻곤 했다. 이 질문의 전제는 분명했다. 사람이 직접 코드를 쓰고, 사람이 직접 제품을 만든다는 전제다. 그런데 그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구글 클라우드 넥스트2026에서 나온 숫자를 보자. 작년 11월 순다르 피차이는 구글 사내 코드의 50%를 기계가 쓴다고 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은 75%다. 사람이 직접 짜는 코드는 이제 4분의 1에 불과하다. 이런 환경에서 "너 요즘 뭐 개발해?"라는 질문은 시제부터 어긋난다.
개발자의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은 이제 코드를 직접 쓰는 대신, 코드를 쓰는 AI 에이전트들을 동시에 풀어놓고 그들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감독하는 일을 한다. 한 명의 엔지니어가 모니터에 띄워둔 여러 에이전트를 관리하면서, 어떤 결과를 만들지 지시하고 그 결과물을 검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구글, 메타, 애플의 시니어 엔지니어가 하는 일이 코칭으로 바뀌었다. 주니어 엔지니어들이 그 밑에서 에이전트를 '달고' 일한다. 회사에서는 에이전트도 직원으로 부른다. GTC에서 젠슨 황이 "AI가 AI를 고용한다"고 한 말은 충격이라기보다 이미 한 달 만에 일상이 됐다.
1-1. 토큰 맥싱(Token Maxxing): 사용량이 곧 KPI
이런 변화 위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새로운 행동 양식이 바로 '토큰 맥싱(Token Maxxing)'이다. 직원 개개인이 자신에게 할당된 일일 AI 토큰 한도를 얼마나 채우는지를 회사가 측정하고, 사내 모니터에 띄운 리더보드 위에 그 순위가 실시간으로 올라간다. 인텔 같은 전통 기업도, 구글이나 메타 같은 빅테크도, 갓 시작한 스타트업도 예외 없이 이 게임에 들어와 있다. "오늘 토큰 한도 다 썼다"는 말이 자랑거리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챗GPT 창에 인간이 직접 질문을 두드려 넣는 방식만으로는 하루 토큰 한도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한도를 채우려면 결국 에이전트를 풀어놓고 24시간 일을 시켜야 한다.
그래서 베이 에어리어 직원들의 감각이 바뀌었다. 책상에 앉아 일을 시키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내 에이전트들이 어디선가 돌아가고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에이전트가 일하는 시대다.
토큰 맥싱이 AI 개발 문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 이전까지의 소프트웨어 개발 문화가 가지고 있던 "사람의 시간이 가장 비싼 자원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산성을 최적화하는 것이 곧 회사의 생산성을 최적화하는 것"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 하나를 정면으로 뒤집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실리콘밸리의 모든 매니지먼트 기법, 애자일이든 스크럼이든 OKR이든, 그 밑바닥에는 이 전제가 깔려 있었다.
토큰 맥싱은 이 전제를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AI의 추론량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는 새명제로 갈아치운다. 다시 말해, 회사가 한 시간에 얼마나 많은 토큰을 소비할 수 있느냐, 즉 얼마나 많은 AI 추론을 동시에 돌릴 수 있느냐가 그 회사의 진짜 생산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새로운 등식 안에서 토큰 소비를 일으키는 '추동자' 역할을 한다. 한 사람이 더 많은 에이전트를 더 똑똑하게 풀어놓을수록, 그 사람의 가치는 올라간다.
이 문화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숨은 전제가 있다. "더 많은 토큰 소비는 더 많은 가치 창출과 정비례한다"는 가정이다. 이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현재 단계에서의 베팅에 가깝다.
그러나 실리콘밸리 빅테크들은 이 베팅을 받아들이고 있다. 토큰 사용량과 가치 창출의 상관관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토큰을 적게 쓰는 회사는 분명히 뒤처진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심하면서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 일단 풀가동시키고 효율은 나중에 잡는 쪽이 지금 시점에서는 더 안전한 베팅이다.
여기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직접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우리 회사는 토큰 맥싱을 하고 있는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토큰 한도 좀 늘려달라"고 요청해오는 문화가 우리 조직 안에 있는가?
잘하는 한국 스타트업도 이미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실리콘밸리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분기만 늦어도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INSIGHT
마이크로소프트가 50년 만에 KPI를 바꿨다. 과거에는 '좌석 수(Seat)' '너희 회사 200명이면 오피스365 라이선스 200개'가 매출 공식이었다. 지금은 '와트당, 달러당 토큰 수'다. 즉 분모가 와트와 달러이고 분자가 'AI 아웃컴(결과물)'이다. 50년 된 글로벌 SaaS 챔피언이 자기 비즈니스의 단위 자체를 갈아엎었다. 한국의 SaaS 기업, 한국의 SI 기업이 이 신호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향후 5년의 운명을 가른다.
1-2. AI는 앱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기인 이유
AI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인식이 산업의 모양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다. AI는 앱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기라는 말은 실리콘밸리에서 널리 퍼진 인식이다.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리가 전기를 어떻게 쓰는지를 먼저 떠올려보면 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인류를 잠시 상상해보자. 해가 지면 모든 활동이 멈췄다. 빛이 없으니 일을 할 수 없었고, 동력이 없으니 무거운 것을 옮길 수 없었다. 인간의 노동 시간은 태양의 운행이라는 물리적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20세기 초 전기가 발명 돼 일상으로 들어왔다. 밤에도 공장이 돌아갔고, 도시는 24시간 깨어 있게 됐으며, 통신과 운송과 제조의 모든 기반이 다시 설계됐다. 전기는 "새로운 앱"이 아니었다. 모든 앱이 그 위에서 돌아가는 새로운 토대였다.
지금은 AI가 지금 그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AI는 워드프로세서나 엑셀처럼 우리가 필요할 때 열고 안 쓸 때 닫는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다. 플러그를 꽂으면 자동으로 흘러 들어오고 빼면 사라지는, 나의 의식적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사회 전반에 항시 존재하는 인프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콘센트에 코드를 꽂는 순간 우리가 전기의 존재를 따로 의식하지 않듯이, 머지않아 AI도 그렇게 인식되지 않은 채 모든 활동의 바닥에 깔리게 된다. 이 관점이 한 번 자리 잡으면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 하나가 갑자기 어색해진다.
"우리 회사는 AI를 도입해야 할까?" 이 질문은 1920년대에 어느 공장주가 "우리 공장은 전기를 도입해야 할까?"라고 묻는 것과 같은 무게로 들리게 된다. 도입 여부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도입하지 않으면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AI를 앱으로 보는 한 우리는 "어떤 AI를 살까"를 고민하지만, AI를 전기로 보는 순간 질문은 완전히 바뀐다. "이 새로운 전기 위에서 우리는 어떤 산업을 새로 설계할 것인가." 한국의 기업과 정책 결정자들이 지금 이 질문을 자기 언어로 던지고 있는지가, 향후 10년의 격차를 결정할 것이다.
2. 투자 환경이 바뀌었다: 풍요 속의 가뭄, 초거대 투자유치의 그늘
CB인사이트의 2026년 1분기 벤처 보고서(State of Venture Q1 2026)는 충격적 데이터가 담겨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글로벌 벤처 투자액은 2,855억 달러, 한국 돈으로 약 380조 원이다. 1분기 단일 분기 기준 역대 최고치이며, 2022년 1분기 이후 가장 강력한 분기다. 수치만 보면 벤처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돈이 없다"는 말이 끊이지 않을까. 답은 거래의 분포에 있다. 1분기 거래 수는 6,598건. 최고점이었던 2022년 1분기 대비 61%나 폭락한, 2016년 4분기 이후 최저치다. 자본은 줄지 않았다. 다만 극소수의 거대 베팅으로 응축되고 있을 뿐이다.
2-1. 오픈AI 단일 거래가 전체 시장의 43%
1분기 전체 투자금의 86%가 1억 달러 이상의 "메가 라운드"에 들어갔다. 그중 오픈AI 단일 딜이 1,220억 달러, 시장 전체의 43%를 흡수했다. 2위 앤트로픽 300억 달러, 3위 웨이모 160억 달러, 4위 xAI 75억 달러까지 더하면 사실상 시장의 80%가 4~5개 회사로 빨려 들어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머지 14%를 두고 전 세계 스타트업이 경쟁하는 구조다. 벤처캐피털의 본질이었던 "널리 뿌리고 한두 개의 대박을 노리는 분배 시스템"이 "극소수를 위한 흡수 시스템"으로 변질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자본의 중력은 철저히 AI로 기울었다. 2025년 전체 VC 투자의 3분의 2가 AI 한 분야에 집중됐다. AI 네이티브 경쟁자가 당신의 시장 점유율을 집어삼키지 못할 이유를, 당신은 지금 당장 증명해야 한다. 회사뿐 아니라 직원도 마찬가지다. "왜 에이전트가 아니고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를 매일 증명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됐다.
2-2. 투자금 회수 가뭄, 그리고 구주 거래의 부상
벤처캐피털(VC) 산업도 침체에 빠져 있다. 지난 1분기 활동 중인 글로벌 투자자 수는 9,999명. 2020년 3분기 이후 최저치이며, 전 분기 대비 10% 줄었다. 미국, 아시아, 유럽 모든 지역에서 자본 공급자들이 시장을 떠나고 있다.
반면 소수의 검증된 '스마트 머니' VC들이 1억 달러 이상 빅딜 80건을 1분기에만 주도했다. 자본 권력이 극단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신호다. 예전처럼 낭만적으로 투자하는 시기는 데이터상 이미 지났다.
출구는 좁아졌다. 글로벌 엑시트는 2년 내 최저치로 떨어졌고, 미국이 분기 대비 2% 하락한 사이 유럽은 21%, 아시아는 25%가 폭락했다. M&A와 IPO 창구가 빠르게 닫히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상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최상위 프라이빗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구주 거래(세컨더리) 라운드를 조성해 IPO 없이도 주주의 유동성을 엔지니어링하고 있다. 2025년 세컨더리는 역대 최고치 536건을 기록했고, 2026년 1분기에만 134건이 쏟아졌다.
변두리 도구였던 세컨더리가 시장의 필수재로 격상된 것이다. 팔로알토 집값이 오른 이유 중 하나가 오픈AI와 앤트로픽 직원들의 세컨더리 현금화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도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 시사점
한국에서도 "세컨더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IPO 의존형 엑시트 구조에 갇힌 국내 VC와 LP에게, 미국이 보여주는 "상장 없이 유동성을 만드는" 모델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5년 뒤 한국 벤처 생태계가 어떤 형태일지를 미리 보여주는 청사진에 가깝다.
2-3. 유니콘은 미국 독점, 모멘텀은 물리적 층위로
1분기에 새로 탄생한 유니콘 45개 중 32개(71%)가 미국 기업이다. 유럽 6개, 아시아 4개에 그쳤다. AI 붐이 이끄는 새로운 유니콘 생태계는 철저히 미국 대륙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모멘텀이 소프트웨어에서 '물리적 층위(피지컬 레이어)"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포머 최적화 ASIC, 비전 언어 모델(VLM) 개발사, 양자 컴퓨터 제조사 같은 영역이 모멘텀 점수 상위권을 점령했다. 채용 모멘텀에서도 액체 로켓 엔진(62.0점)과 달 착륙선(57.7점)이 1, 2위를 차지했다. 자본이 움직이는 곳으로 인재가 흐른다.
들리는 얘기로는 스탠퍼드 컴퓨터사이언스 교수들도 적지 않은 수가 '피지컬AI'로 넘어갔다. 국방, 딥테크, 우주, 반도체 인프라가 인재의 새로운 중력장이다.
한국이 "피지컬 AI에 강하다"는 자기 평가에 안주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신호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같은 영역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3. 스타트업 생존공식이 바뀌었다: 스티브 블랭크의 경고
"당신의 스타트업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Your Startup Is Probably Dead on Arrival)."
린 스타트업 방법론과 "고객 개발(Customer Development)"이라는 단어 자체를 만들어낸 스티브 블랭크가 자신의 블로그와 지난 2026년 3월 INC 매거진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 자신이 정의한 그 단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스티브 블랭크의 블로그에 등장하는 사례가 있다. 크리스라는 창업자다.
자율주행 드론, 군집 드론 기술에 5년간 몰입해 독자적인 소프트웨어 해자를 구축했다. 기존 항공 플랫폼과의 통합도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끝냈다. 그런데 펀드레이징이 되지 않았다. 3년 전 라운드에서는 "이 정도면 중국제로 대체 불가"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은 거절만 돌아왔다.
블랭크의 답은 차가웠다. "크리스, 자네가 머리 박고 자율주행 문제 풀고 있는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났네. 모든 방산 기업이 같은 문제에 뛰어들었어. 지난 5년간 국방 벤처 투자 규모가 0에서 연 200억 달러로 폭증했고, 자네가 해자라고 믿었던 기술은 지금 수백 개 회사가 더 큰 자본으로 풀고 있어."
기술에 파묻혀 있는 동안 그가 구축한 소프트웨어 해자는 매일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이제 해자는 기술로 구축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구축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3-1. 붕괴된 세 개의 법칙
스티브 블랭크가 짚은 첫 번째 법칙의 붕괴는 '속도와 비용'이다. 과거에는 MVP 개발에 수개월이 걸렸다. 지금은 바이브 코딩으로 며칠, 몇 시간 만에 MVP가 완성된다. MVP는 더 이상 팀의 역량 증명서가 아니다.
두 번째 법칙은 '팀 규모'다. 대규모 개발팀이 필수였던 시대에서, 창업자 한 명 또는 공동창업자 두 명이 모든 걸 처리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주변에도 있다.
두 명짜리 팀에 "투자받지 그래?"라고 권하니 "필요 없다"고 답한다. 명확한 문제, 명확한 매출 창구, 그리고 두 명. 그게 전부다. 세 번째는 "데이터 해자"다. 공개 데이터를 수집·가공해 만든 데이터 해자는, 파운데이션 모델이 공개 데이터를 통째로 범용화(commoditizing)하면서 녹아내렸다.
3-2. "자본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시대"
여기서 한 가지 예측을 하고 싶다. 2년 뒤, 메타(Meta)가 컨슈머 AI 영역에서 의외의 우위를 가져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할 독자가 많을 것이다.
메타의 라마 스택은 오픈AI와 앤트로픽에 비해 분명히 뒤처져 있고, 최근의 성능 평가에서도 우위를 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측의 근거는 모델의 현재 성능이 아니라, AI 시대의 경쟁 규칙이 어떻게 바뀌고 있나?에 있다. 왜 메타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 가지 개념을 짚고 가야 한다. 바로 '기회비용'이다.
AI는 인터넷 경제의 법칙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인터넷 산업의 가장 강력한 경제 법칙은 '한계비용 제로'였다. 한 명의 사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든 십억 명에게 제공하든, 추가로 드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깝다는 뜻이다.
구글 검색을 한 번 더 돌리는 데 드는 비용, 페이스북 게시물 하나를 더 띄우는 데 드는 비용은 사실상 0이었다. 그래서 일단 서비스를 만들어놓으면 사용자를 무한히 늘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략이 됐다. 더 많은 사용자가 더 많은 광고 매출을 의미했고, 그것이 곧 인터넷 시대의 승리 공식이었다.
AI 시대에는 이 공식이 무너진다. 챗GPT 한 번의 응답을 생성하는 데는 GPU 연산이 들어가고, 그 GPU 연산은 결코 0의 비용이 아니다. 사용자가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실제 비용이 발생한다. 그래서 지금 오픈AI와 앤트로픽이 모델을 풀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푸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이 비싸지고 있다. 한계비용 제로가 무너졌다.
GPU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메모리 생산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GPU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메모리를 어디에 우선 공급할 것인가. 즉 어떤 고객과 어떤 서비스에 우선적으로 할당할 것인가가 모든 의사결정의 핵심이 됐다.
한 곳에 GPU와 메모리를 배치하면 다른 곳에는 배치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기회비용'이다. 한계비용이 거의 0이던 인터넷 시대에는 "이걸 더 한다고 다른 걸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AI 시대에는 정반대다. 이걸 더 하면 다른 걸 못 한다.
이 변화가 메타의 위치를 흥미롭게 만든다. 오픈AI와 앤트로픽은 지금 가지고 있는 GPU를 B2B 엔터프라이즈 고객, 즉 돈을 가장 많이 내는 대기업 클라이언트들에게 우선 배치하고 있다. 일반 컨슈머용 신모델은 출시되더라도 사용량이 빠르게 통제되거나 일부 고객에게만 먼저 풀린다.
반면 메타는 다르다. 컨슈머 AI에서 뒤처져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메타에게 자원의 여유를 만들어줬다. 본격적인 아직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축적해둔 GPU와 데이터센터 자원이 고스란히 미래의 베팅 자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메타가 던진 결정적 한 수가 있다. 맨해튼 절반 크기의 데이터센터 '하이페리온(Hyperion)'에 200억 달러 투자를 발표한 것이다. 이 발표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메타가 AI에 돈을 많이 쓴다"는 것이 아니다.
메타는 AI 시대의 진짜 자원이 모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것을 돌릴 물리적 인프라, 즉 GPU와 전력이라는 사실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빅테크 중 하나라는 신호다.
그리고 광범위한 컨슈머 AI 인프라 여유를 가진 빅테크는 사실상 메타가 유일하다.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클라우드를 빌려 쓰고 있고, 앤트로픽은 아마존과 구글의 자원을 나눠 쓰고 있다. 자기 데이터센터에서 자기 모델을 자기 사용자에게 마음껏 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회사는 메타와 구글 정도다. 그중에서도 컨슈머 플랫폼을 이미 30억 명 규모로 가지고 있는 회사는 메타뿐이다.
이 진단이 단순한 종목 분석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 시대의 경쟁 우위가 모델의 똑똑함이 아니라 "누가 GPU와 전력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물리적 차원으로 내려왔다는 사실. 그것이 메타 사례가 보여주는 진짜 메시지이다.
알고리즘은 누군가 따라잡을 수 있지만 데이터센터는 물리적으로 짓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전력은 국가 단위에서 확보해야 한다. GPU는 엔비디아의 생산 캐파에 의해 절대량이 제한된다. 이것은 더 이상 소프트웨어 산업의 경쟁이 아니다. 토지와 에너지와 반도체가 결합된 중후장대 산업이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분명해진다. 한국은 AI 컴퓨트 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AI 데이터센터를 충분히 짓고 있는가? AI 하드웨어를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더 이상 IT 산업의 경제 의제로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역의 문제이며, 안보의 문제이며, 국력의 문제다. 메타의 200억 달러 데이터센터 한 곳이 한국 1년 R&D 예산의 상당 부분과 맞먹는다는 사실 앞에서, 한국이 어떤 차원의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점검할 시점이다.
3-3. SaaS 아포칼립스: 진짜 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SaaS 기업들이 자기 사업을 지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자신의 회사 화면(UI)에 사용자가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서비스로 옮기려면 새 화면을 다시 배워야 하니 귀찮아서 안 옮긴다. 업계에서는 'UI 마찰력'이라고 부른다.
회사의 데이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었다. 수년치 데이터가 여기 쌓여 있으니 옮기는 게 큰일이다. 이 두 가지가 SaaS 기업들의 가장 든든한 방어벽이었다. 이 것을 '해자(Moat)'라 부른다.
그런데 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면서 이 두 방어벽을 동시에 무너트린다. 화면이 익숙한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용자가 직접 화면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AI 에이전트가 대신 클릭하고 대신 입력한다. 에이전트는 새 화면을 학습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데이터 이전도 그렇다. 한 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데이터를 옮기는 일은 예전에는 사람이 며칠 매달려야 하는 노동이었지만, 이제는 에이전트에게 시키면 하룻밤도 안결려 끝낸다. 코드도 복제가 쉬워졌다. 클로드 코드 같은 도구로 경쟁사가 만든 기능을 며칠 만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이 흐름이 단순한 코드 작성, 화면 개선, 업무 흐름 자동화에 의존해 살아가던 SaaS 기업들을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다. 거대 AI 모델 한 번의 업데이트로 그 기업의 핵심 기능이 통째로 무료로 풀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매달 수십만 원의 구독료를 받던 기능이, 오늘 챗GPT의 새 기능 하나로 대체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짜 방어벽은 어디에 있을가? 역설적으로 디지털에서 멀어질수록 강해진다는 것이다. 즉, 물리적 세계, 인간의 관계와 깊게 얽혀 있는 사업일수록 AI가 함부로 침범하기 어렵다.
정확히 적용된다. 그리고 이 연결을 짚는 순간, 손재권 대표의 강연 전체가 한 단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AI 에이전트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모라백의 역설은 1980년대 카네기멜론대의 한스 모라벡이 발견한 '역설'이다. AI에게 체스 두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비교적 쉬운데, 두 살짜리 아이가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 즉 걷고 물건을 잡고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는 발견이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어렵다"고 느끼는 일, 즉 수학 문제를 풀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일은 AI에게 쉽다. 반대로 인간이 너무 쉬워서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일, 즉 손가락으로 컵을 집고 계단을 오르고 사람의 표정을 읽는 일은 AI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AI 에이전트도 마찬가지다. AI가 잡아먹기 가장 쉬운 영역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어렵다고 느꼈던 영역이다. 코드 작성, 문서 요약, 데이터 분석, 보고서 작성, 디자인 시안 제작. 이 모든 작업은 인간 입장에서 학습 비용이 컸고, 따라서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비싸게 팔렸으며, 그 위에 SaaS 시장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AI에게는 정확히 이 영역이 가장 쉬운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의 데이터는 디지털 텍스트와 이미지로 풍부하게 축적 돼 있고, 패턴이 명확하며, 정답에 가까운 형태로 학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역의 SaaS 기업들이 가장 먼저 무너진다.
좋은 예시가 미국의 나반(Navan)이라는 회사다. 모라벡 역설의 SaaS 버전이다. 나반은 기업 출장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인데, 직원이 출장을 갈 때 항공권 예약부터 호텔, 경비 정산까지 한 번에 처리해준다.
이 사업은 왜 AI 시대에도 안전한가? 나반은 전 세계 수천 개 항공사와 호텔과의 직접 계약망을 가지고 있다. 에이전트가 웹페이지를 긁어와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항공사와 일일이 법적 계약을 맺고, 결제 시스템을 물리적으로 연동하고, 분쟁이 생겼을 때 책임지는 구조까지 만들어야 한다.
앤트로픽이나 오픈AI가 갑자기 "우리도 출장 예약 서비스 시작합니다"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나반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의 출장 담당자라는 매우 특수한 직군을 고객으로 잡았다. 이 사람들과의 영업 관계, 계약 갱신 사이클, 기업 내부 결재 시스템과의 연동까지 수년에 걸쳐 쌓아온 자산이 있다.
그래서 앤트로픽이 나반의 사업 영역에 진입할 확률은 0%에 가깝다. 이유는 단순하다. 앤트로픽 입장에서는 발 닿는 곳마다 더 쉽고 더 큰 시장이 널려 있다. 이미 노출된 금괴가 도처에 있는데, 굳이 진흙탕 속에 손을 넣어 은괴를 주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빅테크가 기술적으로 못 들어오는 게 아니라, 들어올 우선순위 자체에 들지 않는 영역. 그 자리가 AI 시대 SaaS의 진짜 안전지대다.
인간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조차 하지 않는 영역. AI에게는 학습할 데이터 자체가 텍스트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영역. 모라벡이 말한 "두 살짜리 아이의 손동작"의 비즈니스판이 바로 이런 사업들이다.
4. 실리콘밸리는 이런 스타트업을 찾는다
AI 시대에 '신기함'으로 포지셔닝하는 시대는 끝났다. AI 시대가 막 시작됐을 때 처럼 "첫 시도"라는 호기심 자극이 통하던 18~24개월이 지나갔다.
지금 실리콘밸리 VC들이 묻는 것은 세 가지다. 단순한 API 래퍼인가 기술적 깊이가 있는가? 고객의 고질적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가? 창업자의 비전이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가? 통과의 핵심은 '압도적 유용성(Real Utility)'과 '빠른 학습능력(Learning Fast)'이다.
빠른 실행(Moving Fast)이라는 한 시대의 미덕은 이제 충분조건이 아니다. 생존의 핵심은이 이제 '새로운 도구의 빠른 흡수와 통합'이 됐기 때문이다. 으로 옮겨갔다. 완벽한 스택을 가진 팀보다, 지형 변화에 가장 빠르게 이터레이션하는 팀이 승리한다.
초기 스택은 의미가 없고, 소규모 팀이 빠른 반복과 깊이 있는 장인정신(Deep Craft)으로 제약 속에서 빌드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기존 프로세스를 AI로 효율화하지만 백지상태에서 "이 문제는 원래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AI 네이티브'다.
11살짜리 아이도 AI 툴로 A/B 테스트를 하고 실제 수익을 창출하는 시대다. 중요한 것은 나이도, 자격증도 아닌 'AI 네이티브 마인드셋'이다. 60대 회장님과 70대 교수님과 인턴이 똑같은 출발선에 서는 시대다. 코딩 스킬셋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아이디어를 실체화하는 실행력이 진짜 자격증이다.
실리콘밸리 VC들이 다시 주목하는 창업자 유형이 있다. 화려한 록스타 CEO가 아니라, 한 도메인에 깊게 집착하고 본질에 미쳐 있는 '지루한 창업자'다.
쿨해 보이는 기술 자체보다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특정 산업의 비효율과 고통을 해결하는 데 열정을 쏟는 사람. 또 화려한 언론 플레이나 네트워킹보다 고객 지표와 프로덕트 디테일에 몰두하는 사람. 기존 플레이북 없이 묵묵하고 끈기 있게 문제를 타파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AI 시대에 대규모 펀딩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5. 한국 스타트업과 VC, 이렇게 해야 한다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의 공식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 스타트업이 글로벌 진출을 하는 전통 경로는 '국내에서 성공한 뒤 글로벌로 확장한다'였다. 쿠팡이 이 길을 걸어 나스닥에 상장했다. AI 시대에 이 경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실리콘밸리도 전체 투자의 2/3가 AI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시장 규모로는 현재 글로벌 VC 생태계가 요구하는 '메가 라운드' 단위의 펀딩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VC 접근성이 부족하고 메가 라운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두 가지 제약이 겹치면서, '국내용 모델'은 더욱 자본 고갈의 벽에 부딪힌다. 한국에서만의 창업은 처음부터 불리한 출발선에 서는 셈이다.
물론 영역에 따라 다르다. K-팝과 K-뷰티처럼 한국어를 써도 글로벌이 되는 영역이 있다. 한국 내에서 성공해 그 자체가 글로벌이 되는 모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글로벌 VC 자본을 빨아들여야 살아남는 영역, 즉 AI 파운데이션 모델, 우주, 국방 딥테크 같은 메가 스케일 산업에서는 한국에서 '메가 라운드'를 주도하지 않는 한 실리콘밸리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
5-1. 시작부터 글로벌
'한국서 성공 후 글로벌 진출'은 성공 가능성이 더 좁아지고 있다. '처음부터 글로벌'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제품 설계, 타깃 고객, 조직 문화 모두가 창업 1일 차부터 글로벌을 지향해야 한다.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해외의 막대한 자본과 인재를 흡수한 글로벌 경쟁자에게 물리적으로 압도당한다.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한국의 가장 큰 약점은 '평평하고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는 관성이다.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담지 않는다는 공식은 밴처캐피털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얇게 많이 뿌리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
지금의 글로벌 VC들은 100억 원을 100개 기업에 나눠주지 않는다. 1조 원을 소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승자'를 찾는다.
창업자는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을 넘어, 수백억 달러의 자본이 투입되었을 때 산업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메가 스케일(Mega-scale)의 청사진'을 증명해야 한다. 딥테크, AI 파운데이션, 우주항공처럼 거대 자본 자체가 진입 장벽이 되는 시장을 겨냥하라는 의미다.
기계적 제약이 사라진 시대, 진입 장벽은 오직 우리의 상상력과 결단력뿐이다. 미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방관자가 아니라, 합리적 낙관주의자(Rational Optimists)의 몫이다.손재권 더밀크 대표
5-2. 결국 남는 것은 '본질에 기반한 진화력'
그동안 더밀크가 실리콘밸리에서 현장 취재한 데이터를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로 모인다. 변동성의 시대, 결국 살아남는 것은 '본질에 기반한 진화력(Adaptive Resilience)'이라는 점이다. 압도적 유용성 증명, 데이터 플라이휠 가동, 백지상태에서의 재설계.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조직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AI가 일자리를 빼앗고 디스토피아를 만들 것이라는 과장된 공포는 무시해도 된다. 실제 데이터는 새로운 엔지니어링 일자리의 폭발적 증가를 가리키고 있다. 방사선과 의사가 사라질 것이라던 제프리 힌튼의 10년 전 예언은 빗나갔다. AI 보급으로 오히려 사람의 해석이 더 중요해지면서, 방사선과는 인기가 늘었다.
우리가 알던 실리콘밸리는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실리콘밸리의 규칙은 명확하다. ① 시작부터 글로벌 ② 메가스케일 라운드 참가 ③ 피지컬AI에서 새로운 승부 ④ 압도적 유용성 ⑤ 본질에 기반한 진화력 이 다섯가지 단어가 다음 5년 한국 스타트업과 VC의 생사를 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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