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깨워야 한다”… 독일 디지털장관이 던진 승부수
[IFA 2026 현장] 정부·기업이 함께 그린 ‘피지컬 AI’ 반격 움직임
“AI는 위험하다, 하지만 못 만드는 게 더 위험하다”… 빌트베르거 장관의 진단
다비드 레거 노이라 로보틱스 CEO도 피지컬 AI 강조
규제를 무기로: 밀레가 자발적으로 꺼낸 ‘디지털 제품 여권’
더밀크의 시각: 한국 정부·기업 과제
“AI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이 기술을 스스로 다루지 못하고, 만들지 못해 종속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지난 4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 시티큐브 이노베이션 스테이지. 독일 연방 디지털·국가현대화부 장관 카르스텐 빌트베르거 박사는 “우리의 과제는 이 나라를 깨우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 최대 가전·소비자 기술 박람회 IFA 2026 공식 개막 첫날 독일 정부 디지털 분야 최고 수장이 무대에 올라 자국 산업계를 향해 각성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실제로 최근 독일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업률은 2013년 이후 최대인 6.3%로 올라갔고, 2025년 기준 기업 파산 건수는 1만7604건으로 2005년 이후 20년 만에 최다를 기록했다.
AI로 촉발된 거대한 산업 변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가전, 자동차 등 독일의 제조업 근간이 흔들리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실제 IFA 2026 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전기차, 로봇 등 중국 기업 900여 곳이 전시장의 절반을 채웠고, 관람객들의 시선은 편리한 AI 기술이 적용된 중국 가전 제품에 더 오래 머물렀다.
“AI는 위험하다. 하지만 못 만드는 게 더 위험하다”… 빌트베르거 장관의 진단
핵심은 독일이 지금의 상황을 위기로 인식,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빌트베르거 장관은 독일 연방정부 디지털·국가현대화부 장관으로서 이날 IFA 공식 개막 투어를 이끌었다.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 프란치스카 기페이 베를린 경제·에너지 담당 상원의원과 함께 AI·로보틱스·소비자기술·가전 전시장을 둘러본 뒤 정오에 IFA 공식 프로그램으로 신설된 ‘정책 세션: 디지털 정책, 실전 점검’ 대담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 세션에는 독일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밀레(Miele) 4대째 공동경영자이자 독일전기전자산업협회(ZVEI) 가전산업 부문 대변인인 라인하르트 크리스티안 칭칸(Zinkann) 박사가 함께 참석했다.
빌트베르거 장관이 강조한 첫 메시지는 속도였다. 그는 “어떤 속도로 일하는지 알 수 있는 공급자들이 많다”며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기준”이라고 했다. 브랜드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개막 투어 자체가 샤오미 로봇 부스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중국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는 이어 신기술을 보면 위험한 점부터 찾는 독일 산업계 특유의 습관, 태도를 지적하며 독일이 용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의 승부수가 인간형 로봇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로봇이나 돌봄 보조기기처럼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기기에 AI 지능을 결합하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중국 휴머노이드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 잘 하는 부분, 시장이 필요로 하는 부분부터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다.
빌트베르거 장관은 2025년 5월 프리드리히 메르츠 내각에서 독일 최초의 디지털·국가현대화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가전 유통 대기업 세코노미(구 미디어마르크트자툰)의 최고경영자 출신으로서 가전 전시회 무대에 장관 신분으로 돌아와 산업계에 각성을 촉구한 셈이다.
언어모델은 내줬다, 로봇에서 승부한다… 독일이 선언한 전선 이동
또 한 가지는 눈에 띈 대목은 장관이 독일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칭칸 박사가 중국의 국가적 지원과 느슨한 규제를 언급하자 빌트베르거 장관은 부분적으로만 동의했다. 그것만으로 중국 제조사들의 혁신 성과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뉘앙스였다.
그는 독일이 어디서 지고, 어디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를 구분했다. 특히 언어모델(LLM) 분야에서는 독일이 멀리 뒤처졌다고 인정했다. 반면 독일 스타트업 블랙포레스트랩스(Black Forest Labs)의 이미지 생성 모델 ‘플럭스(Flux)’처럼 프론티어급 모델이 독일에서도 나왔고, 구글 같은 빅테크도 이 모델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
빌트베르거 장관은 특히 로보틱스를 승부처로 명확히 지목했다. “독일과 유럽에는 특별한 기회가 있다. 우리의 강점은 기계공학, 센서, 자동화, 안전, 정밀, 생산”이라고 했다. 제조업 강국 독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어왔고, 이제 거기에 지능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26년 상반기 독일에서 3053개의 신규 스타트업이 창업했고, 그중 상당수가 AI 관련 기업이었다. 다만 그는 “이 기회의 창은 오래 열려 있지 않다”며 업계에 속도를 낼 것을 주문했다.
독일 가전협회 gfu가 IFA 개막을 앞두고 지난 8월 20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독일 기술소비재(TCG) 시장 매출은 206억 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2.5% 감소했다. 이 가운데 가전제품(대형 가전) 매출은 5.1% 줄어든 44억 유로에 그쳤다. 로봇청소기·물걸레 로봇 판매량은 같은 기간 66.1% 급증하며 예외적으로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는데, 이는 대부분 중국 브랜드가 이끈 증가분이었다.
다비드 레거 노이라 로보틱스 CEO도 피지컬 AI 강조
하루 뒤인 9월 5일 IFA 무대에 오른 다비드 레거 노이라 로보틱스(NEURA Robotics)의 창업자 겸 CEO의 기조연설도 주목을 받았다. 독일 로봇기업으로서 빌트베르거 장관과 비슷한 시각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레거 CEO는 ‘유럽에서, 세계로: 피지컬 AI 생태계 구축하기’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2030년까지 유럽·미국·중국에서 수억 명 규모의 노동력 공백이 다가올 것임을 강조했다. 노동력 부족 문제 극복을 위해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노이라 로보틱스는 피지컬 AI 시대를 준비할 독일의 대표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6월 10일 14억달러(약 1조880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했으며 아마존, 엔비디아, 퀄컴 같은 실리콘밸리 빅테크와 이막엑스팬드(imec.xpand), 보쉬, 유럽투자은행(EIB) 등 유럽 기업이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노이라 로보틱스는 투자금을 활용해 2030년까지 수백만 대 규모의 로봇 양산 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또 자체 휴머노이드 로봇 학습 플랫폼 ‘뉴라버스(Neuraverse)’도 확장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유럽의 여러 관련 스타트업을 노이라 로보틱스 산하로 합쳐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도 실행 중이다. 지난 8월 초 보쉬 렉스로스(Bosch Rexroth)의 무인운반차 사업부 ‘액티브 셔틀’을 인수했고, 독일의 자율주행 청소로봇 제조사 아들라투스 로보틱스의 지분 100%도 인수한 상태다. 피지컬 AI로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목표다.
더밀크의 시각: 독일, 한국의 미래 보여줘... 유리한 무대를 찾아라
이번 IFA 2026에서 확인한 독일의 움직임은 한국에 세 가지 층위의 시사점을 던진다.
독일 정부는 “우리가 언어모델에서 뒤처졌다”는 사실을 정부 최고위 인사가 공개 석상에서 먼저 인정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렇다면 어디서 이길 것인가”라는 구체적 답을 제시했다.
한국의 피지컬 AI 역시 어디에서 승부를 볼 것인지 구체화하고, 정부가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실행 계획이 필요하다. 정부, 스타트업,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밀레 같은 전통 제조기업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독일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다.
규제를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접근 방식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 사례를 보면 독일 자국 기업 밀레가 규제 의무화 전에 선제적으로 이를 따르면서 선례를 만든 케이스다. 규제와 새로운 표준에 더 빨리 적응해 시장 우위를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국도 향후 AI 로봇·가전 제품에 대한 데이터·안전 규제를 설계할 때 이런 전략을 참고할 수 있다. 단순히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및 사회에 도움이 되는 표준을 선제적으로 만들고, 빠르게 체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독일의 전략이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여부다. 미국과 중국의 부상 속에서 독일은 아직 AI 시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독일이 강점이라 자부한 모터·액추에이터 산업에서도 중국 뿐 아니라 한국의 LG전자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독일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확인하며 한국의 스위트 스팟(Sweet Spot)을 찾아야 한다.
완성형 휴머노이드보다 액추에이터·센서·배터리 등 로봇 밸류체인 상위 구간에서 한국이 이미 보유한 제조 경쟁력을 접목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적 전략이 될 것이다. 속도가 관건이므로 한국 역시 로봇 산업 육성 정책의 실행 속도를 국제 경쟁 시계에 맞출 필요가 있다.
AI 경쟁의 축을 모델 크기가 아니라 ‘기계에 들어간 지능’으로, 한국에 더 유리한 전장 혹은 무대로 바꿀 필요가 있다. 정부와 기업이 한목소리를 낸 이번 IFA 무대는 한국이 마주칠 가까운 미래를 미리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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