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법은 시작: 미국 기본권, 줄줄이 우회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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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2022.06.27 03:16 PDT
낙태법은 시작: 미국 기본권, 줄줄이 우회전된다
미국 연방 대법원 앞에서 시위대가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을 종이 인형으로 만들어 풍자하는 모습 (출처 : Gettyimages)

낙태가 더 이상 합법이 아니라는 미 연방 대법원
9명의 대법관이 6대 3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 공식 폐기
대법관 임기 종신직이라 보수와 진보 균형 맞추기 어려워
앞으로 당분간 모든 면에서 보수적인 판결 나올 듯

미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 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한 뒤 미국이 둘로 갈라졌다. 개인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성향에 따라 이 판결에 울부짖을 수도 있고 환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판결이 9명의 연방 대법관 사이에서 5대 4도 아니고 6대 3으로 판결이 났다는 점이다.

미국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각축장으로 불리는 연방 대법원이 어떻게 이렇게 보수적인 조직이 된 걸까?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 32년 동안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확히 각각 16년 동안 정권을 나눠가졌다. 9명의 현 대법관은 모두 이 기간 동안 임명됐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확률적으로는 대법관의 성향도 대통령의 성향과 같이 진보와 보수가 비슷해야 한다. 대통령들은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같은 성향의 법관을 지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너무나도 보수적이다.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출처 : Getyimages)

종신 임기의 맹점

지금 내게 남은 가장 강렬한 바람은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내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2020년 9월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으로 사망하면서 손녀에게 남긴 말이다. 당시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긴즈버그 대법관은 트럼프가 당연히 자신을 대신할 대법관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을 임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임 임명이 다음 정권으로 미뤄졌으면 좋겠다는 긴스버그의 바람이 터무니 없는 건 아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막판에도 연방 대법관 자리가 공석이 된 적이 있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보수적인 성향의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 자리에 새로운 온건한 중도 성향의 판사를 임명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 원내대표였던 미치 매코널은 임기 말의 레임덕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후보에 대해서는 인준 청문회도 열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오바마가 임명한 판사는 대법관이 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8개월이나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오바마에 이어 백악관의 주인이 된 트럼프는 바로 보수 성향의 법관 닐 고서치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2020년에도 여전히 원내대표였던 매코널은 긴즈버그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긴스버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트럼프의 사람 에이미 코니 배럿 임명에 동의해줬다. 정치권의 ‘내로남불’은 어디 가나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긴스버그는 진보 진영에서 사퇴를 종용 받은 적이 있다. 2010년 오바마가 대통령이었을 때 일이다. 70대 후반으로 암 투병 중이었던 긴스버그는 진보 성향의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 사퇴해서 진보 성향의 대법관이 그의 뒤를 이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긴스버그는 사퇴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자리는 10년 뒤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차지했다.

미국 연방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한 번 연방 대법관이 된 후에는 사망하거나, 그만 두거나, 은퇴하거나, 탄핵되지 않는 한 직을 유지한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대법관의 자리가 언제 비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1년간은 대법관들의 신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새로 임명된 대법관이 없었다. 반면 트럼프 임기 4년 동안에는 무려 3명의 보수적인 연방 대법관이 새로 임명됐다.

이는 연방 대법원이 보수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트가 낙태를 합법화한 판결이 폐기된 공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을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은 연방 대법원의 ‘우회전’에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83세로 가장 고령인 진보 성향의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이 1월 은퇴를 선언한 이유도 민주당의 바이든이 대통령일 때 후임이 임명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올 11월 이후에는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바이든이 진보 성향의 법관을 임명하더라도 상원의 인준을 받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바이든은 2월 진보 성향이면서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인 커탄지 브라운 잭슨을 브라이어의 후임으로 임명했고 4월 인준을 받았다.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지금 진행 중인 회기가 끝난 뒤 브라이어를 대신해 임기를 시작한다.)

미 연방대법관 이념성향 (출처 : 미국 연방 대법원, 그래픽: 김현지)

더밀크의 시각

1973년 낙태가 합법화된 이후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 여성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이렇다 할 영향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가장 놀라운 연구 결과는 시카고대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이 저서 ‘괴짜 경제학’에 소개해 유명해진 미국 전역의 범죄가 줄었다는 연구일 거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나는 아이가 줄어들면서 범죄율이 낮아졌다는 이 연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하지만 미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미국인들의 삶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급격하게 보수화된 연방 대법원은 앞으로 총기 소유나 동성 결혼은 물론 투표권과 의료보험, 소비자 보호, 직장법과 같은 첨예한 사안에서도 보수적인 쪽으로 판결을 내릴 것이다. 기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보수 6’ 대 ‘진보 3’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보수적인 기류는 계속될 전망이다. 이 체제가 언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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